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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는 사람의 이야기

​익명 10

● 죄송합니다. 으레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토니가 나오지 않습니다.


사뭇 달랐다. 첫 출근이 결정되고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아 지하철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었을 때, 처음 이 빌딩의 유리문과 금속 탐지기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을 때, 묵직한 승강기는 지나치게 빠르고 부드러워 마치 사람이 아닌 문밖의 공간이 바뀌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1층 버튼을 꾹 눌렀다가 떼었다. 옛날엔 몰랐지만 미세하게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닳아 있다. 아마 처음부터.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는다. 그건 출장이었다. 나에게는 사람을 살릴 자유가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 직장을 떠날 수 있고, 내가 원치 않는 만남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더하여 내 자경 활동으로 인한 피해가 예상될 때, 그것이 이웃을 향하지 않도록 발 빠르게 조치할 의무가....


과장님은 급하게 볼일이 생겼다며 쓸데없이 꼼꼼한 막내에게 서류를 넘겼다. “진짜 미안! 부탁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이미 설계부터 구현이 끝난 납품 대상 품목들의 목록과 그 물건들에 관한 요구사항 리스트를 전달받은 제품 개발팀 막내는 두 자료를 대조하는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싸한 감각이 몸을 타고 흘렀다. 평소에 정리하던 자료와는 용어들이 미세하게 다르고, 써내야 하는 보고서의 양식도 기존과는 조금 달랐다. 거미의 감각이 말했다! 야근은 확정이라고. 그러나 과장님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 전 신혼집을 구하고 몇 주 동안이나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집을 치우는 중이라고 하시는데, 저번 주말 과장님의 남편이 접촉사고를 당하며 한쪽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동산 계약에 문제가 생겨 오늘은 판매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웃는 얼굴로 출근을 하셨다. 피터가 할 수 있는 일은 회사에서나마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얼마나 열심히 했냐면, 업무 시작 30분 만에 최근 3년간의 관련 산출물을 모조리 열람했을 정도였다.


피터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답지 않게 감도 좋았다. 그래서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이 보고서를 거치는 제품들은 이후 어느 자료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보증 기간이나 버전 문제로 교묘하게 수거 또는 폐기 대상이 된다. 마치 사라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이상함을 느끼지만 보고서는 내일 퇴근 시간까지 완성되어야 했고, 그 전에 과장님에게 한 번 보여드린 다음 수정할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내일 오전까지는 내용이 완성되어야 했다. 일단 손을 움직이며 모든 내용을 눈으로 훑었다.


다크서클이 앉기 시작한 과장님의 눈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동산 문제는 잘 해결되셨는지. 과장님은 가볍게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다.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이다. 그리고는 사내 메신저로 보고서 파일을 보내드렸다.

“좋아. 이대로 내도 되겠어요. 대단한데?”


“진짜요?”


“응. 이쪽은 대충 해도 되거든. 위에서 별로 신경 안 쓰더라.”


좋은 소식에 막내는 궁금했던 사실을 입에 올렸다. 그런데, 그 물건들은 어디로 가는 거예요? 처음 보는 회사던데. 사실 나도 잘 몰라. 필요한 곳으로 가겠지.


여기서 더 물어보면 괜한 지적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이미 지친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뉴스에 등장한 어느 자료 화면에서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성능과 재질의 잔상을 보며 알아챘다. 누군가가 새 물건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누군가는 그걸 일부러 줍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었지만 피터는 회사로 달려갔다. 그리고 기억하는 모든 자료를 닥치는 대로 모아 개인 드라이브에 올리고, 일부는 출력했다. 자료 자체만으로는 밀매 사실을 한눈에 보여주기 어렵다. 한 번 정리가 필요했다. 뉴스에 나온 영상은 따로 링크를 따 최대한 유사한 자료들과 함께 묶어 사내 전체에 메일로 첨부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피터의 컴퓨터가 꺼졌다.


아직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는지 다급하게 전원을 확인하는 피터 앞에, 파란 양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일반 사원이 저런 옷을 입고 주말에 회사에 나올 것 같지는 않고(일요일이지만 피터는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얼굴이 기억날 듯 말 듯한 게 임원인 것 같았다. 가끔 이 회사의 대표와 TV에 나오는 사람. 갑자기 연예인을 본 기분이 되었다.


“무슨 일이지? 이런 주말에. 애사심이 너무 좋은 것 아닌가.”


“급한 일이 떠올라서요. 이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료는 몇 년째 과장님이 관리하던 것이었다. 모든 책임이 그분에게 쏠릴지도 모른다. 이건 과장님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사람 말고는 관여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함구하고 말았다. 이것이 첫 번째 실수였다. 차라리 여기에서 다 말해버릴 걸.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열쇠를 지닌 건 나였다고 말이다.


“자료를 두고 가서요. 오늘 집에서 보려고 했는데,”


“그치만 오늘은 일요일이지 않나. 그리고... 개발팀이지? 이쪽 자료는 외부로 가지고 나가면 안 될텐데.”


“혼자 공부하려고 그랬습니다. 죄송해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말이 조금 이상하게 나가고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들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만 든다.
남자는 허허 웃고는. 정색하며 질책을 한 다음, 다시 표정을 풀며 말했다.


“자네 이름이 뭐지?”


“피터, 파커 입...”


“파커.”


“네!”


“자네 출장 비자 받을 수 있나?”


음. 네. 그리고 약간의 면담이 이어졌다. 그 임원의 개인 사무실로 불려가느라 메일이 잘 전송되었는지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오베디아 스탠. 피터가 속한 팀과는 접점이 별로 없었고, 또 피터는 사내 정세에 별로 관심이 없어 입사 이후로는 이름을 떠올릴 일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이름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토니 스타크의 대부와도 같은 사람이잖아!


여기서 잠깐 얘기를 해 보자면... 토니 스타크의 아버지인 하워드 스타크는 토니 스타크가 지금의 피터와 비슷한 나이일 무렵에 아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회사는, 이 산업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몸체는 토니의 것이 되었다.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법도 하지만, 이 사람은 어린애나 다름없어 보이는 소년을 지지해주고, 이끌어 주었다. 아니면 남몰래 시기했거나. 그러나 이미 그는 높은 자리에 올라 있었다. 적어도 피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머리는 좋지만 리더로서는 조금 많이 아쉬운 사람을 도와가며 이 기업의 번영을 도왔다. 사내의 적지 않은 사람
들이 그를 실질적인 우두머리로 보고 있기도 했다. 그래, 그래, 잘 알고 있구만. 역시 애사심이 출중하구나.


피터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스르륵 지나가버린 스크립트 중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입으로 나갔는지를 떠올려 보고 있었다. 젠장. 기억이 안 나잖아.


면담 내용은 충격적이기도 하고, 충격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랬다. 한 달 뒤 아프간에서 진행할 신제품 시연에 수행원 역할로 포함될 거라는 얘기였다. 자세한 얘기는 월요일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 임원은 피터의 회사 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친한 사원이 있는지, 평소에는 어떤 업무를 하는지, 혹시 토니 스타크의 팬보이는 아닌지. (얼추 맞기도 하다는 답변을 했다.) 그리고 끝까지 컴퓨터는 켜보지도 못하고 귀가를 했다. 월요일 아침 컴퓨터를 켰을 때, 피터는 경악했다. 모든 자료가 사라져 있었다. 다행히 드라이브에 올렸던 자료는 남아 있었지만 회사 내부
서버와 출력해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자료들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과장님에게 물었더니 그 업무는 다른 팀에 이전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보다, 좋은 소식이 있다고 했다. 우리 둘 다 한 번에 승진할 것 같아. 과장님도 그 출장에 포함되었다.

정확히 한 달 뒤, 둘은 다른 수행원들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대표님은 전용기 타고 간대. 부럽다.”


과장님의 표정은 좋아 보였다. 한 달간 피터에게는 갑작스런 출장과 업무 변경이 연이어 일어났다. 솔직히 말해서, 일반인이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강도였다. 그래도 남는 시간엔 틈틈이 자료를 정리해 중간에 과장님께 사안에 대해 말을 꺼낼 겨를이 있었다. 그러자 그리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유사한 성능을 가진 제품을 우리만 생산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였다.


영상을 보여드리자 확실히 비슷하긴 하다는 말씀을 하긴 했지만 지금 우리 둘에게 그런 생각을 더 이어갈 여유는 없었다.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과장님의 개인 사정은 차차 나아져 미국을 떠날 때쯤엔 완전히 안정된 상태였다. 계약 문제는 잘 마무리되었고, 남편분도 완전히 나아지셨다고 말이다. 게다가 꼼꼼하고 사려 깊은 부하 덕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회까지 잡았다. 쉽게 발을 디디기 힘든 곳이었다. 이 어린 친구에게 고맙고도 미안했다.


피터를 질투하는 사람은 많았다. 가진 건 고등학교 졸업장 밖에 없으면서, MIT 대신 SI를 선택했다지. 돈과 시간을 들여 더 많은 것을 준비해 온 사람들에게 시스템의 파괴처럼 보이는 어리숙한 고등학생은 사회가 던지는 농담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신입도 이런 기회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성능 명세를 보는 것만으로 이런 눈썰미를 발휘하여...


문득 떠오르는 불안감을 내리눌렀다. 이건 꽃길일 뿐이다. 앞으로는 안정된 삶만이 펼쳐져 있겠지.


“덕분에 이런 경험도 해보고 말이야.”


동행했던 과장님은 돌아오지 못했다.


범인은 이미 피터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터를 포함한 몇몇 직원들은 아직도 보호 및 감시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쪽에서도 별다른 일을 꾸미진 못했다. 그러나 피터를 그런 중요한 자리에 끼워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입김이 센 사람들인 것 같으니 이 보호가 끝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최근에는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는 것도 최대한 주의하려 노력했다. 집 가까이에서는 가능하면 자경 유니폼을 갈아입지 않고, 되도록 평범하게 걸어 다니는 시간을 늘렸다. 주변 동료들과 친밀하게 보일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평
소 피터에게 친절하던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전보다 자주 피터의 상태를
살피러 다가왔지만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의자는 거대한 창 밖의 도시를 마주보고 있었다. 토니는 그렇게 가지런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자리를 뜨진 않는다. 그 자리에는 누군가 앉아있었다. 고요하게. 아무런 제약 없이.

사고 이후로 지니기 시작한 권총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경호팀을 호출했다.


의자가 돌아갔다. 천천히 들어가는 의자 너머로 빨간 마스크가 보인 순간 총을 조용히 집어넣었다.


“잘 지내셨어요?”


몇 번이고 찾아가볼까 고민하게 만들었던 모습이 드러났다.


“나야 잘 있었지. 잠깐만.”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지금쯤 마음을 한껏 졸이고 달려오고 있을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별 거 아니었어.”


그러나 해피는 안심할 수 없는 듯 했다.


“그럼 혼자 올라와. 손님이 있어.”


대충 전화를 끊고 방문자를 바라보았다.


“몸은?”


다른 질문들이 많았지만, 입으로 나온 건 하나였다.


“올해 들어 이렇게 좋았던 적이 없네요.”


신기하게도 사실처럼 들렸다.


“9시가 지나도 한참 지났잖아요. 설마 매일 이 시간에 오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오늘은 일이 있어서 좀 일찍 나왔어.”


“오. 너무하네요.”


“여기. 당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에 관한 자료예요. 내용은 직접 확인하시고,”


눈 깜짝할 새에 창틀 위에 걸쳐 앉은 사람이 이어서 말했다.


“출근 빼먹지 마세요!”


건물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남자는 창문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이어서 반동으로 상승하기 시작한 존재가 슬쩍 뒤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창문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그제서야 실감이 난다. 피터는 그를 구했다.

내부자이고 싶다.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름을 버리고 그들의 곁에 언제나 있고 싶었다.


“우리의 이웃이 위험에 처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이름을 숨긴 정체불명의 위협으로부터!”


커다란 스크린에서 고풍스럽다 못해 경박하기까지 한 말투를 가진 진행자가 누군가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얼굴이 사라지고 나타난 저화질의 흑백 사진은 어딘가 익숙하고 끔찍했다. 회백색의 도시를 바탕으로 어디가 벽인지 바닥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지만 빨간 웃옷을 입어 사진 속에서는 검은 상반신이 강조되어 보이는 인물이 아무렇지 않게 공중에 서서 (떨어지는 중일지도 몰랐다.) 한 손에는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시민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래. 사람을 들고 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면 안 되는 일이다. 들린 사람은 얼마나 무섭겠는가.


퇴직금은 짭짤했다. 그 돈으로 작은 카메라를 구했다.


집에 가고 싶었다. 어딘지 모를 집으로. 아직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유동식 크리스마스 합작 
    ​Special thanks to redco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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