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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 In

​익명 1

※스톡홀름 증후군 주의


이상한 사람과의 이상한 동거가 시작된 지 며칠 인지 몇 달인지 세기도 어렵다. 확실한 건 계절은 변해있었다. 내가 구한 사람은 어딜 봐도 완벽한 사람이었는데—침대 사정에 관한 소문은 피터도 말을 얹지 않는다.—이렇게 불안정하고 위험한 사람이었을 줄이야.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벗어날 수는 없다. 아니 도망갈 순 있지만 매번 붙잡혀온다. 그 뒤의 고통이 너무나 크고, 기회를 노리기도 쉽지 않다.
 
스타크 씨가 돌아오시면 일단 인사를 한다. 감금된 입장이지만 지내는 곳이 너무 좋아서. 그럼 스타크 씨가 오늘 뭐 했는지 물어본다. 나는 성실히 답하려 노력하지만, 사실 이 집에서 할 수 있는 게 얼마 없어서 답변은 거의 비슷하다. 무얼 먹었다, 씻었다 등. 이 집엔 시계도 없어 언제 씻었다, 언제 일어났다는 말도 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런 말을 하며 스타크 씨를 따라가면 침실이 나온다. 납치당해서 눈 뜨고 한동안 나오지도 못 했던 그 방으로.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말이 끝나든 말든 일단 침대에 눕혀진다. 한 겹 입고 있다기보단 걸치고 있던 저지조차 지퍼가 내려가고 입이 맞춰진다. 처음엔 마냥 거부했던 키스지만 이젠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다. 어색하게 움직이는 입술을 따라 스타크 씨가 마저 입을 맞춰주시면 스타크 씨의 바지가 볼록해진다. 어쩌면 여러 개의 잠금이 열리고 들어오셨을 때부터 그렇게 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집안에서 할 게 없어도 혼자 있는 게 마음이 편했기에 스타크 씨가 들어오면 절로 몸이 긴장된다. 이처럼 후에 일어날 일 때문에. 


입술의 움직임이 둔해져 딴생각하고 있는걸 눈치채신 건지 들켜 머리가 잡혔다. "아," 소리를 내며 가만히 쳐다보자 매섭게 노려보신다. 입을 떼고 그저 "죄송해요." 사죄하면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곤 몸을 뒤집어 엉덩이를 만지시는 거다. 이 집에서 지내며 그래도 스타크 씨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얼굴을 할 땐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중 스타크 씨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침묵과 표정에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어떤 반응이 찾아올지 몰라 그저 빤히 쳐다만 보고 있다. 오늘도 내 엉덩이는 혹사당하는구나. 윽, 하고 입에서 짓이겨진 소리가 나왔다.  

 

 


*


이 생활에 익숙해졌단 생각이 든다. 아침과 밤으로—시간은 모르지만, 아침의 상쾌한 냄새가 나고 스타크 씨가 출근하시기 전이니 멋대로 아침이라 부르고 있다.— 스타크 씨가 출퇴근하시기 전, 후에 몸을 섞고 쓰러져 기절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음식이 놓여있었다. 이 집안에 사람이 들어온 건가 싶어 조금 무서웠다. 다른 사람을 보는 게 무서워졌다. 한동안 사람의 얼굴은 티브이로도 접하지 못했었고, 스타크 씨의 얼굴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으니 당연한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법을 까먹은 기분이다. 아무래도 옷  때문인거겠지.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도망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거니까. 지금도 허벅지와 궁덩이에 닿는 식탁 의자의 서늘한 느낌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수건을 써도 될까? 음. 그냥 저지를 벗어 깔고 앉기로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스파이더맨으로 돌아갔을 때 무얼 할지 생각해 본다. 이미지 메이킹. 샐러드 맛있네. 달마르 씨 샌드위치 양상추는 이렇게까진 아삭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아무래도 샌드위치 안에 있다 보니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나. 높은 곳에서 밥 먹는 것도 그립다. 지금도 아주 높지만. 차가운 바람을 맞아보고 싶어. 답답하다고 느낄 정도로 좁은 집은 전혀 아니지만 그래도 바람이 그립다.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가며 퀸즈 시민들이 안전하게 걸어 다니는 걸 보면 절로 뿌듯해져 샌드위치의 맛도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웹슈터를 쏠 때에는 두 손가락으로 누르는 게 좋아 보여. 꾸욱 누르는 게 더 잘 나가는 것 같아. 그때 사막에서 좀 건조했더니 퀸즈 기후랑은 달라서 좀 끈적했던 것 같아. 그래서 발사가 잘 안되었나봐. 그래서 세게 눌렀더니 스위치가 조금 금이 가 있었고.
바삭한 빵에 베이크드빈, 에그 스크램블을 올리곤 크게 두 입 베어 물었다. 냉장고를 향해 시뮬레이션을 돌리듯 웹슈터를 발사하는 상상을 해본다. 이렇게라도 움직여보면 나중에 스파이더맨으로 돌아갔을 때 실수를 하나라도 줄이고 싶어서. 양 볼에 음식물을 넣은 채로 산만하게 움직이다가 마저 음식을 먹었다.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이는 게 건강에도 좋으니까. 항상 깨끗한 집 안이라도 청소해 볼까? 가령··· 형광등? 형광등은 위에 있으니까 자주 청소하기엔 어렵지 않을까. 뛰어난 시력으로 형광등을 자세히 보니 먼지도 거미줄도 하나 없어 보인다. 잠만 자는 것도 지겨워지기 시작해 자신이 입은 옷의 빨래라도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이 집에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고 옷이 마르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 이건 그만두기로 한다.


흠. 과거 반성이라도 해볼까. 뛰어난 두뇌는 과거의 일들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남이 주는 음료는 함부로 먹지 말 것. 그렇지만 할머니가 주신 추로는 괜찮지 않나? 
기후 상황을 생각하고 웹슈터 카트리지를 만들 것.「그날」이 생각나 시원한 바람이 드는 구멍이 생겼던 옆구리를 괜히 만져본다. 그곳에 간 걸 후회한 적은 없으나 대체 그때 어떻게 했어야 지금의 상황이 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한다. 그때의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으나, 그래도 라는 상상은 해본다. 그때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스타크 씨가 내게 원하는 건 무엇일까. 이 장소에 가만히 있고 반항하거나 도주 우려가 없어 보이면 아프게는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침실의 일도 조금은 버틸만하게 해주신다. 이렇게 나와서 밥도 먹게 해주고 말이지. 


*


오늘은 출근하시는 스타크 씨를 배웅하려고 나갔을 때 들은 말이 있었기에 먹은 걸 정리하고 집구경을 해보기로 했다. 

"접시 싹싹 비우면 집 안을 구경해봐도 좋아. 말 잘 들은 강아지에겐 상이 필요한 법이지. 알아서 둘러봐. 그렇다고 이 문을 나갈 생각은 추호도 않는 게 좋을 거야."

이런 폭탄 발언을 두고 간 스타크 씨는 방금 톡톡 건드린 문을 열고 나갔다. 얼빠져있는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먼저 식사를 하기 위해 부엌으로 가 식사를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다 먹은 접시를 설거지해두고 신나는 탐험을 해보기로 한다. 
처음엔 어디까지 허용될지 몰라 여기저기 탈출할 수 있는 구멍을 찾으며 집구경을 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으로 보이는 문은 다가가려고 하자마자 5m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허용된 장소가 아닙니다. 뒤로 물러서 주십시오."

아주 정중한 목소리가 근처에서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라 천장에 붙어버렸던 적이 있었는데 오히려 자신을 놀라게 한 걸 사과하며 자신의 주인이 허용되지 않은 장소를 몇 군데 설정해 두었다고 말해주었다. 이름은 '자비스'라고 하는데 그 '스타크 씨'가 만든 이토록 완벽한 인공지능이라는 점이 신기하고 다른 사람과 대화해본 적이 없었기에 말을 붙여보려고 했으나, 불행히도 주인이 피터와 대화를 길게 할 수 있지 않도록 설정해 두어 다시 피터는 혼자 집을 탐험하게 되었다. 자비스가 말해준 부분은 조심하며 바라보기만 하거나 자비스에게 물어보고 방문을 열어보기도 했는데, 서재 내지는 작은 도서관으로 보이는 곳은 들어갈 수 있었다. 많은 책이 쌓여있는 공간은 항상 피터를 두근거리게 만들었지만 이렇게 과학과 수학책이 많은 곳은 처음이라 마치 <미녀와 야수> 속 야수에게 아주 커다란 도서관을 선물 받은 벨의 기분이 이럴 거로 생각하던 와중 어딘가에서 자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께서 피터 파커 군에게 서재 출입을 허용하셨습니다. 무엇이든 꺼내 읽어도 된다는 전언 있으셨습니다."

말 잘 들은 아이에게 주는 선물인 걸까? 기쁘게 관심이 가는 제목의 책들을 꺼내 바닥에 앉아 읽었다. 책상은 너무 고급스러워 보이고 괜히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자유의 시간도 잠시 스타크 씨가 온 것도 모른 채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고있자 손목이 붙들렸다. 

"스타크 씨? 벌써 오신 거예요?"

들고 있던 책을 놓지도 못한 채 반대편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이렇게 끌려가는 건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어 내팽개치고 싶지만, 스타크 씨를 다치게 하고 싶진 않다. 아까 내가 들어가려고 했을 땐 막혀있던 문이 열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팔이 붙잡힌 채로 스타크 씨의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둘러보니 드라이버 공구가 여럿 책상 위에 어지럽혀져 있었고, 작은 바와 함께 소파와 텔레비전이 보였다. 밑에 층에는 이렇구나··· 생각하던 와중 스타크 씨가 발걸음이 느려진 걸 눈치챘는지 팔을 다시 한번 강하게 잡아당기셔서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라가기에 집중하려 노력했지만 무려 토니 스타크의 랩실이라니..!!!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기분이 붕 뜬다. 아까까지 책을 읽을 때의 느낌처럼 말이다.
 

입고 있던 저지가 벗겨지고 기다란 베드 같은 곳에 눕혀졌다. 알몸을 스타크 씨에게 보이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뭔가 불안했다. 스트랩으로 온몸이 고정되는데 발버둥 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주사기 바늘이 옆구리를 찌르고 이상한 액체가 몸 안에 주입되었다. 온몸이 기분 나쁘게 뜨거워지는 느낌과 먹은 건 아침 식사 밖에 없는 입에서 이상한 약 맛이 났다. 속이 안 좋아지고 몸이 가려워져 벗어나고 싶었지만 스트랩을 끊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나 스타크 씨에게 다시 혼날까 봐 결국 입을 열었다. 

"제발 뭘 할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픈 건가요? 윽··· 제발요······ 잘못한 게 있으면 고칠게요··· 책 멋대로 꺼내 읽어서 죄송해요. 현관문 가까이 가서 그런가요? 현관문인 줄 몰랐어요. 앞으론 방에서만 조용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숨 쉬는 거 빼고 아무것도 하지 마."

커다란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기계에 들어가게 되는 게 너무너무 무서워 방금의 증상도 잊어버리고 스타크 씨의 말을 상기하지 않아도 온몸이 덜덜 떨리며 움직일 수 없었다. 덜덜 떨리는 근육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전신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동그란 기계가 움직임을 멈췄지만 스타크 씨가 올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였다. 아마도 CT촬영을 하신 것 같았는데 스파이더맨이 된 이후 너무 예민해진 감각으로 기계의 소음과 전신을 관통하는 느낌을 버티기엔 무리였다. 호흡곤란까지 오는 것 같아 스트랩이 빠듯하게 조여졌다 조금 느슨해질 정도로 숨을 거칠게 쉬어졌다. 입안에서 이상한 약 냄새가 사라지지 않아 계속 입으로 숨을 쉬고 있었는데 문을 열고 급하게 스타크 씨가 들어오셨다. 구해달라는 눈빛으로 스타크 씨를 바라보고 있자 목 부터 전신을 고정한 스트랩이 풀렸다. 상체가 자유로워지자마자 바닥에 오늘 먹은 걸 전부 토해버렸다. 토하면서 전신의 열감은 좀 내려갔지만 두드러기가 올라온 피부는 진정되지 않았다. 스타크 씨가 그걸 보곤 새 주사기를 가져왔지만 주사기가 이젠 무서워졌다. 온몸을 손톱을 세워 긁으며 뒤로 몸을 물렸다. 분명 이게 과민 반응이라는 건 머리로 인식은 되지만 전신의 세포가 전부 몸속에 들어온 정체 모를 물질을 거부하는 느낌이다. 풀려난 스트랩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팔로 힘껏 밀어내려고 했으나 힘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 몸으로 성인 남성을 밀어내기엔 어려웠다. 다시 혈관 속에 액체가 들어오는 느낌에 위액까지 더 입으로 내보내 버리곤 지쳐 그대로 베드에 엎어져 있었다. 입에서 침이 계속 나와 벌리고 있었던 입에서 나는 약 냄새는 점점 줄어들어 갔지만 메스꺼움은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손이 덜덜 떨려왔지만 그래도 숨은 제대로 쉬어졌기에 조금은 편안해졌다. 계속 벌린 입 밖으로 침을 줄줄 흘려보내며 간신히 의식을 붙잡고있자 어딘가에서 수액을 가져온 건지 기다란 줄 끝의 바늘을 팔에 꽂으려는 스타크 씨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약물은 싫어··· 작게 바르작거리며 떨어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베드 밖으로 몸을 물리자 상체가 붙잡혔다. 정신없는 와중에 울음까지 터지니 정말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시야가 물기로 잘 보이지 않았는데 입 밖으로 무슨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는 채 중얼거렸다.

"으··· 시···싫어요······ 이제 그만··· 잘못했어요··· 고칠게요······ 이제 주사기 싫어··· 약 싫어요··· 잘못했어요···그만해주세요······ 위로 올라갈래요··· 원래 있던 데로 돌아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이젠 여기가 네 집이야. 알아들어? 정신 차려. 진정제 넣었으니까 나아질 거야. 이건 수액이야. 그냥 포도당 물이라고. 글자도 못 읽는 건 아니지? 수재 과학 고등학생이잖아. 이 정돈 이해하는 게 당연하지. 그새 다 까먹었나?"

무슨 말을 하는진 알아듣겠으나 머릿속에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계속 팔다리를 움직이며 발버둥을 치고있자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만 한 손으로 허리를 붙들곤 수액에 연결된 주삿바늘 뚜껑을 이로 뽑더니 스타크 씨 자신의 팔에 꽂았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로 올라타선 팔을 눈앞에 들이미는 행동에 조금 발버둥이 멎었다. 여전히 가려움이나 메스꺼움 같은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으나 바늘이 꽂혀있는 피부가 보이는 게 이상했다. 왜 이러시는 거지? 무슨 의미, 의도로 이런 행동을 하시는 거지? 몸의 움직임이 잦아드는 것으로 허락을 한 거라 생각하는지 팔이 강하게 붙잡혀 새 수액이 꽂힌다. 잠시 얼이 빠져 있는 동안 주삿바늘이 빠지지 않도록 급한 손이 몇 개의 반창고가 붙이는 걸 지켜봤다. 스타크 씨의 팔로 시선을 옮기니 아까보다 바늘이 빠져있었다. 힘겹게 숨을 쉬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잡아보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툭툭 치는 게 고작이었다. 


스타크 씨는 내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곤 그대로 주삿바늘을 망설임 없이 뽑아버렸다. 피가 크게 한 방울 맺히더니 표면장력을 뚫고 주르륵 흘렀는데 지혈하려면 강하게 눌러야 했지만 흐르는 피를 신경도 쓰지 아니하고 오히려 카테터를 고정하는 일에 여념이 없다. 체모에 간간이 걸렸지만 계속 팔을 따라 흐르는 핏줄기가 너무나 선명했다. 

"Monkey see, monkey do 이군.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스파이더 [몽키]였던 모양이지? 그래서 부정한 건가?

고정된 카테터에서 눈을 떼곤 흐트러진 베드 위 시트를 가져다 팔을 닦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타크 씨가 말한 건 전에도 들었던지라 흘려들었으나 피로 물든 시트는 눈길이 갔다. 그때는 이렇게 피가 흐를 정돈 아니었는데. 당시 다친 부위보다 크기가 아주 다르고, 핏줄을 찔렀기에 피가 흐른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주룩 흐르는 핏줄기를 보니 마음이 안 좋다. 


내가 도망갔을 때도 스타크 씨는 피를 흘리진 않았지만 상태가 무척이나 안 좋아 보였다. 밖에서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가기까지와 딱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스타크 씨의 상태가 무척이나 안 좋아 보였었지만 그 당시에는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가야 했단 공포와 무력감에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었다. 가만히 누워 수액을 맞으며 생각해 보니 스타크 씨의 그 당시 상태가 생각나는 거다. 야위었었던 것 같고. 차로 이동하며 꽉 잡은 손이 덜덜 떨렸던 것 같다. 땀이 맺힌 이마와 목은 흐르지 않고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식은땀을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마치 지금처럼 송골송골 물방울의 무게를 표면장력이 이기지 못해 밑으로 후드득 떨어졌었다. 


이 사람은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정확히 한 단어로 정의 내려주시고 원하는 바를 가져가시어 얼른 놓아주셨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라앉는 기분에 안심이 되어 눈을 감았다.

 

 


*


이제까지 내가 먹어본 음식 중 가장 고급스러운 음식이겠지만 술술 넘어가진 않는다. 그래도 남기면 안 되니까 몇 개의 접시를 다 비운다. 다 먹는 게 배부르기도 하고. 식사 시간은 완전히 정해져 있진 않고 오히려 조금 들쑥날쑥하다. 내가 잠들어있을 때만 음식이 오기도 하고, 냉장고는··· 음. 솔직히 열어봐도 될지 모르겠다. 사실 식탁 위의 음식도 스타크 씨가 먹다 남긴 줄 알고—그런 것 치곤 먹은 흔적이 하나도 없었지만—다 식어가도록 가만히 내버려두곤 러그에 웅크려있자 스타크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돌아봤지만 문이 열릴 때의 바깥 공기의 냄새도, 조금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아무런 인기척도 팅글도 울리지 않았는데. 
소리를 낸 주인은 어딨는지 모를 스피커였는데, 이 장소에 카메라라도 설치되어있는지 식탁 위 음식이 바뀌지 않은 걸 확인할 수 있었나 보다. 말을 하면 들을 수 있나? 싶어서 우물쭈물하고 있자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밥을 안 먹어서 기운이 없는 거야 아니면 바다의 마녀에게 목소리라도 약탈당했나? 두리번 거리는 게 강아지가 따로 없군그래."

이리저리 두리번 해봤지만 이상하게 여기저기서 소리가 울리는 기분이다. 스피커가 여러 개인가? 싶었지만 궁금증보단 대답해야 했다. 

"어······ 안녕하세요? 이렇게 그냥 말해도 되나··· 음. 식사 남기고 가신 줄 알았어요. 치우는 법을 몰라서 그대로 냅뒀는데.. 엄.. 제 음식이었나요? 먹어도 되는 줄 몰랐어요. 먹어도 되나요?"


"그래. 너 먹으라고 아주 편지라도 남겨두고 올걸 그랬네."


"아, 감사합니다 스타크 씨. 스타크 씨도 맛있는 점심 되세요."

그 뒤로 말이 없기에 식탁 의자에 앉아 다 식은 수프와 빵, 로스트비프를 먹었다. 고급스러운 요리라서 그런가 식어도 맛있다. 마침 배고팠어서 3접시를 모두 비우곤 설거지 했다. 그나저나 식사는 누가 갖다주는 걸까. 낯선 사람과 마주했을 때 인사해야 할 텐데 인사하는 법도 까먹었다. 여기에서 겨우 탈출했을 때도 도움도 청하지 못한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다 붙잡혔으니. 숙모에게 갔다간 숙모가 위험해질까 봐 무서웠고, 다른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기에도 저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두려웠다. 정처 없이 방황하다 붙잡혔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짓을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도 저지를까 봐 두렵다. 그러니 얌전히 순종적으로 따르기로 했다. 


그다음에는 최대한 멀리 가보기로 했었다. 수중에 있는 돈이 없어 음식을 사 먹진 못했지만 산속의 과일을 먹고 생선을 잡아먹었다. 이 정도로 멀리 왔으니 좀 관심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숨어있어야겠다 생각했지만 옷을 벗어두고 몸을 닦다가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었다. 목뒤가 뻐근해지고 식은땀이 절로 흘러 차가운 강물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벅저벅 걷는 저 소리는 맹수가 내는 소리가 아니다. 네발짐승의 발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뒷골이 당겨지는 이 감각은 그 사람과 있을 때 느꼈던 느낌이다. 정확하게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규칙적인 소리는 점점 커졌다. 도망갈까, 싶었지만 이 멀리까지 왔음에도 따라온 걸 보면 이 방법도 틀렸다는 증거다. 애초에 다리가 얼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어떡하지. 그 방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걸까. 다시 그 일들을 당해야 하는 걸까 무서웠다. 

 

 

 


*


조금 뻐근한 눈을 억지로 끌어올려 일어나보니 조금 놀랍게도 새로운 장소다. 냄새로는 같은 장소인 것 같은데. 여기는 어디지? 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팔에 연결된 수액이 보인다. 아까와 같은 수액인 건지 의심되어 이걸 뽑아야 하나, 뽑아도 되나 고민하며 몸을 살짝 일으켰다. 수액에 적혀있는 글은 그저 평범한 포도당 물이었지만 정말 포도당 물인지 모르겠어 주사바늘을 빤히 쳐다보고있자 스타크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거의 다 맞았는데 얌전히 있지 그래. 30분도 못 기다리진 않겠지? 자비스. 애 스캔해 봐."


"빠른 신진대사로 원활히 배출되고 있습니다. 이 속도라면 내일 아침 정도엔 말끔히 사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눈앞에서 기절한 건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데 장소가 달라서 어리둥절해 보이는군. 네겐 불행하게도 같은 장소야. 대략 4시간 정도 지났고."

스타크 씨의 목소리에 조금 놀랐지만 덮고 있던 것을 꼭 쥐고서 말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아까는 정말 죽는 줄만 알았어요. 대체 어떤 걸 주사하신 거에요?"


스타크 씨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다시 이 정적이 이상해 나를 쳐다보는 스타크 씨를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스타크 씨는 시선을 거두곤 소파를 빙 돌아 내 앞에 섰다. 나는 스타크 씨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따라가 고개를 돌려 반대편으로 스타크 씨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스타크 씨의 손이 나의 이마를 밀치듯 눌러 다시 소파에 눕게 만들었다.  


"이옥시탈라민산, 이오헥솔, 이오딕산올. 다른 말로는 조영제라고 하지. 자비스에 입력된 모든 부작용이 나타나길래 놀라긴 했어. 초인이라 대사가 빨라서 그런가. 언제나 날 놀라게 만드는 구만. 라따뚜이의 생쥐라도 키우는 기분이야."


스타크 씨는 소파에 누운 나의 저지를 옆으로 치우곤 배를 만졌다. 배와 스타크 씨의 손과는 좋은 기억이 그다지 없어 절로 힘이 들어갔는데 여기서 하실까 봐 겁이 났지만 스타크 씨의 말에 힘이 풀렸다.


"아까 자비스를 통해 네가 배를 만졌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그새 후유증이 나타난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뭘 했길래 배를 만진 거야. 안 그랬으면 토하고 그럴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그걸 치울 일도 없을거고."


"아··· 그냥···이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표정의 변화 없이 시선을 거두지 않으셨다.


"정말이에요.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말끔히 다 나았어요. 음. 잘 아시다시피 전 빨리 나으니까요. 절단은 회복 안 되겠지만······."


랩실에서는 선글라스도 코트도 안 입으시는구나···. 항상 비슷한 모습만 봐서 그런가 조금 모습이 신선한 기분이다.  
배를 마저 만지작거리던 스타크 씨가 일어서서 건너편 책상으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아까 다 게워 냈으니 배고플 법도 한데. 위에 식사 차려놨으니까 가서 먹어. 여기로 내려올 생각일랑 말고."

말을 끝마친 스타크 씨의 등을 빤히 바라보다 스타크 씨의 식사는 어떻게 하실지, 급하게 오셨을 때 일은 잘 해결된 건지 여쭙고 싶었으나 배가 너무나 고팠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덮고 있던 코트를 소파에 잘 개어두곤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홀로그램과 공구가 가득한 책상이 궁금했지만 허락받은 장소가 아니기에 뒤돌아보지 않고 올라갔다. 

 


​*

 


지금 생각해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이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한 사람을 깊게 만나지 않고 여러 사람을 짧고 강렬하게 만나고 다닌다고. 하지만 적어도 계절이 몇 번 바뀔 정도로 시간이 지났고, 지금 이 사람이 제게 하는 행동은 멀리서 보면 마치 애 같다. 떠나려고 하면 초인인 제가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체벌, 같은 공간에 있을 때는 관찰. 관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내지는 동물이 아닌가.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차분해졌다. 


스파이더맨은 도움을 주는 친절한 이웃이다. 많은 사람을 돕고 싶고 자신의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면 죄책감이 들었다. 이와 비슷한 감정을 지금 느낀다. 눈앞의 사람이 자신이 없으면 힘들어하는데 떠나기가 어렵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조금 발버둥을 덜 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침대 위의 움직임이 조금 수월해졌다. 여전히 버겁지만. 


혼자 받기만 하는 생각까지 들어 퇴근 후 침대에 앉아 시계를 푸는 스타크 씨의 앞에 앉아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옆 협탁에 시계를 툭. 소리 나게 내려놓은 스타크 씨가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조금 겁을 먹었지만 딱히 막으려는 듯한 행동은 없어 보여 마저 하던 행동을 이어갔다. 지퍼를 주욱 내리곤 속옷 밴드를 내리려는데 손가락이 스타크 씨의 살에 닿아 조금 움찔 놀랐지만 얼른 밑으로 내렸다. 항상 서 있는 모습만 봤었지만 서기 전에도 이렇게 크구나··· 감상이 들 만큼의 시간을 쳐다보기만 하다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올려보니 아까보다 눈빛이 조금 가라앉아있고 어두워져 있는 듯해 스타크 씨가 강제로 시키셨던 걸 기억해 내며 움직였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정말 나쁘지 않았다. 스타크 씨는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내가 한 행동 이상으로 뭘 시키지도 않으셨다. 스타크 씨의 절정을 받아내곤 상기되어 조금 벌게진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자 머리에 손이 얹어지더니 그대로 샤워실로 들어가 버리셨다. 씻고 나와서 마저 하시겠다는 걸까. 생각하며 입가에 묻어있는 걸 휴지로 닦아내곤 기다렸지만 스타크 씨는 그대로 밑층으로 내려가 버리셨다. 음. 내가 한 게 별로였나. 하지만 처음이었는걸. 다음을 기약하며 연습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CT인지 MRI인지 모를 촬영을 한 것도 아마 집안에 설치된 카메라로 배 부근을 만진 게 보고가 되어 검사하신 것 같았는데 말로 해주시면 정말 좋을 거 같지만 피터의 말은 언제나 전해지지 않았기에 관둔 지 오래였다. 실제로 촬영하고 기절한 날 뒤엔 아무것도 없이 마냥 다친 부위 근처를 물리고 빨리느라 고난이었다. 이상한 사람. 걱정하는 건지 걱정을 안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간지럽고 이상한 기분에 몸을 비틀어도 힘으로 고정하시는 거에 밀어낼 수도 없다. 씻으려고 몸을 내려다보니 물린 자국과 빨린 자국이 가득했다.

그래서 피터 쪽에서 스타크 씨에게 말하기로 했다. 이번엔 정말 마지막으로. 스타크 씨에게 말을 전해보기로. 이 이상한 관계가 적어도 나와 스타크 씨 둘 중에서 하나는 이상하지 않아야 하니 말이다. 


퇴근한 스타크 씨를 기다리다 문을 살짝 열고 나가 저녁 인사를 했다.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저...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옷 갈아입으시면 잠시 시간 괜찮을까요?"

스타크 씨는 나를 빤히 쳐다보곤 말했다.

"나가겠다는 건가? 아니면 심부름?"
 


뭐가 불만족한 건지 스타크 씨는 풀던 넥타이를 손에 쥐고선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스타크 씨가 제게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시는 걸 알고있어요. 제 걱정을 정말 많이 해주시고···. 저번에 촬영도 제 옆구리 걱정이 심하셨던 것 같은데 이 정도는 정말 흉도 없이 말끔히 나았으니까요! 그저 「그날」이 생각나서 그랬던거 였어요. 시간이 꽤 지나긴 했지만 그 느낌은 남아있어서······.
서재 출입이나··· 식사 챙겨주시는거나··· 정말 절 많이 생각해 주시는 걸 알고있어요. 제가 다치고 아픈게 싫···으신거죠? 스타크 씨의 의지로 절 아프게 하는 건··· 음. 저도 이유를 모르겠지만······. 아마도 제가 스타크 씨가 원하는 답을 내놓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만 그것도 즐기시는 거 같고······ 아픈 걸 견디는 건 초인인 제가 잘하는 거니까요! 
어···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절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전 여전히 여길 나가고 싶고. 츄로도 먹고 싶고 친절한 이웃 일도 하고 싶지만 눈앞의 사람을 두고 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실제로 제가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 뒤에 많이 아팠고··· 그러니까 스타크 씨가 괜찮아지실 때까지 전 여기에 가만히 있을게요. 스타크 씨가 절 믿고 안정 되실 때까지."

스타크 씨의 눈을 바라보다가도 바닥이나 천장을 보면서 대화했지만 점점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뀌어 불안해졌다. 불안이 맞나? 머리가 잡혔을 때 발버둥 없이 '죄송해요'사과한 뒤 나오는 표정과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좀 더 사나운 느낌. 도무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라 괜히 무서워져 마저 입을 열었다.

"어··· 음···.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예요. 저녁 식사 아직이시면 뭐라도 드시겠어요? 냉장고에 음식이 있는지 확인해 볼게요."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부엌으로 갔다. 스타크 씨를 등지고 도망치는 기분은 꽤 무서웠는데, 왜 맹수에게서 뒤를 돌리지 말라고 하는지 이제서야 이해가 간다. 굳어있다가 움직여서 그런 건지 떨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이며 도착한 부엌에서 냉장고를 열었을 땐 사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먹다 남은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 샐러드와 빵, 통조림이라도 꺼내야하나 하고 있었다. 부산하게 움직이고 냉장고 문을 닫자 스타크 씨가 옆에 보여 화들짝 놀랐다. 

"무···뭐라도 필요한 거 있으세요?"

말씀드린 게 마음에 안 들었나 행동 중에 마음에 안 드신 게 있었나 난··· 난 스파이더맨이 아닌데··· 스파이더 몽키는 더더욱 아닌데······ 이번엔 뭐라고 하시려나··· 뭘 하시려나······ 우물쭈물대며 바닥을 보던 중 스타크 씨에게 안겨졌다. 


당황스러워 몸의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안긴 건 처음이라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사람의 온기가 이런 식으로 느껴졌던 건 매우 오랜만이라 더욱 침묵이 어색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저지 밑으로 손이 들어와 엉덩이와 허리를 쓸어올렸다. "읏···!" 하고 예상치 못한 손길에 힘주고 있던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야설적인듯한, 하지만 몸을 훑는 것에 가까운 손길에 다음에 일어날 일이 생각나 만지기 편하시도록 다리가 벌어졌다. 


다가올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곤 기다리고 있었는데 순간 몸이 떼어졌다. 의아한 얼굴로 스타크 씨를 올려다보니 아까보다 한층 더 복잡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듯하지만 동시에 댱황한 듯한 표정은 처음 본다. 

"안···하시나요? 배고프세요? 음. 저 씻었는데 냄새나나요······? 아니면 침실로 가길 원하시나요?"

여전히 허리에 둘러져있던 손이 허리를 잠시 문지르더니 당겨져 입이 맞춰졌다. 


이 사람이 키스를 얼마나 잘하느냐와는 다르게 키스 자체가 너무 자극적이었기에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입을 벌린 채로 입안이 희롱당하는 느낌은 여전히 이상하기만 했지만 어설프게 움직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 힘이 덜 빠진 턱을 움직이는 건 무리라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혀는 내밀고만 있지 움직이지는 못했다.

 

*


어젯밤은 생각보다 버틸만한 밤이었다. 적어도 아프지 않았고, 불편한 시간이 조금 지나니 스타크 씨는 뒤로 물러나 지하로 내려가셨다. 다행히 체력이 남아있어 일어나 씻곤 잠에 들었다. 일어나니 다시 식사를 했고 책을 읽었다. 모르는 건 자비스에게 물어보기도 하며 지식을 쌓았다. 지식을 쌓는 게 재밌었다. 


작지 않은 서재의 적지 않은 책들을 거의 다 읽다 보니 시야에 머리카락이 걸린다. 머리가 꽤 길어 귀 뒤로 넘어갈 정도가 되었다. 곱슬 진 머리는 귀 뒤로 넘기기에 조금 어려웠기에 집 안에 가위가 있나 싶어 여기저기 서랍을 뒤져보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찾아."

화들짝 놀라 쥐고 있던 서랍장의 문고리를 부숴 먹었다. 다급하게 붙여보려고 했지만 이미 부러져버린 문고리는 어떻게 하지 못했다. 

"한 번 더 놀라면 집안 살림 다 부수겠군. 필요한 게 있으면 말로 해. 집 뒤지지 말고. 뭐가 필요한데."

피터는 손잡이를 붙이는 걸 포기하고 어딘가로 입력되어 전달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와 허공에 말하는 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저··· 머리가 너무 많이 길어서요. 가위는 혹시 집에 없을까요? 아무 가위나 상관 없어요. 주방에 가봐도 식칼도 없어서··· 서재에도 커터 칼은 없고······ "


"어린애한테 그런 걸 쥐어줄 리가 있나. 있어. 사람 시켜서 갖다 달라 할게."


"어······ 이 안에 들어오시는 걸까요 도우미분께서? 침실 안에 가 있을게요."


"왜. 싫어? 그새 사람 만나는 게 어색해진 모양이지?"


"아···아니에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전 이만 자볼게요."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책 안에도 사람의 얼굴은 있었는데 사람 대하는 게 어려운 걸까? 


아니면 여기서 나가게 되는 걸 두려워하는걸까.
아무래도 나를 도망치게 해주는 사람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인 거겠지. 하곤 문을 잠그고 잠에 들었다. 


사람이 왔다간줄도 모른 채 해질녘 즈음에 일어났다. 이 집에 와서는 시간 감각도 모른 채 살아 곤란하다. 이러다 일상으로 못 돌아가면 어떡한담. 스타크 씨 출퇴근 시간도 뒤죽박죽이고. 


적어도 식사 시간은 유동적이지 않은 편이기에 일어나서 문을 열어보니 식탁 위에 식사와 귀여운 장식이 달린 세안밴드가 올려져 있었다. 

 

 


분명 피터 파커가 말한 건 [가위]였다. 세안밴드가 아니라. 끔벅이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대로 옆을 지나쳐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오늘의 메뉴는 샌드위치와 비프스튜, 디저트로는 크림 브륄레였다. 예전에 먹었던 음식들과는 신선도 자체가 다르고 요리 과정도 다르겠지만 조금 반가운 음식에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자마자 입안에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자꾸 밑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식사에도 독서에도 방해가 되어 자르고 싶었던 거였는데. 입안에서 머리카락들을 빼내곤 음식물을 씹었다. 소스가 한가득 묻은 머리카락을 싱크대에서 대충 씻곤 자리에 다시 앉았다. 옆에 세안밴드가 시야에 걸렸지만 무시하고 머리카락이 입에 들어가지 않게 고개를 틀어 마저 샌드위치를 먹곤 스튜를 먹었다. 배가 따뜻하게 차올라 좋은 기분이다. 


 

    ​유동식 크리스마스 합작 
    ​Special thanks to redco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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